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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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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는 258년 선비족 탁발력미가 근거지를 삼아 세운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탁발씨는 서진의 봉신으로 시작했으나, 내분과 혼란을 겪으며 세력을 키웠다. 315년 대왕에 봉해지며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나, 내부 갈등과 주변 국가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북위를 건국하며 대의 부흥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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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시대진나라
후조
전연
전진
지위속국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310년 – 376년
수도성락 (310년–324년, 337년–338년, 340년–376년)
동목근산 (324년–327년)
대녕 (327년–337년)
번치 (338년–340년)
현재 국가중국
몽골
지도
369년의 중국. 대나라가 지도 상단에 보인다.
369년의 중국. 대나라가 지도 상단에 보임.
역사
주요 사건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 (315년)
건국310년
멸망376년
이전서진
이후전진
통치자
군주탁발의로 (310년–316년)
탁발십익건 (338년–376년)
언어 및 화폐
공용어선비어
화폐알 수 없음

2. 역사

258년, 선비족의 추장 탁발력미는 백성을 이끌고 버려진 한나라운중군 성락을 점령하고, 조위와 그 후계 국가인 서진의 봉신이 되어 인접 부족들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했다. 단석괴의 통일 선비가 붕괴되고 다시 분열된 선비족에서 대두한 것이 탁발부(拓跋部)의 기원이었다.[2] 탁발력미는 주변 부족을 복속시키고 조위와 수교를 맺어 세력을 크게 확대했지만,[2] 위관의 이간책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일으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

294년 탁발록관이 추장이 된 후, 탁발씨의 영토를 서부, 중부, 동부로 나누어 자신과 조카들에게 분할했다. 이 분열은 10년 동안 지속되었고, 307년 서부 탁발씨의 추장 탁발일률이 다시 통일했다.

310년, 탁발의로병주 자사 유곤과 협력하여 흉노족의 전조(한)와 맞서 싸웠다. 유곤의 추천으로 대선우·대공(代公)에 봉해졌으나, 유주를 통치하던 왕준은 이를 거절했다. 탁발의로는 왕준의 공격을 격퇴했고, 유곤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315년, 서진의 민제는 탁발의로를 대왕(代王)으로 봉하고, 관직을 설치하고 형법을 제정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대국(代國)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탁발의로는 막내아들 탁발비연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장남 탁발육수의 반발을 샀고, 탁발육수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 이후 탁발보근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국내는 혼란에 빠졌다.

316년, 탁발의로가 장남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이어지면서 대는 혼란에 빠졌다. 탁발보근이 탁발육수를 죽이고 새로운 대왕(代王)을 칭했지만, 위기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탁발보근과 그의 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족장들은 그의 사촌인 탁발울률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318년 6월, 철불부(鐵弗部)의 류호(劉虎)가 황하를 건너 다시 대국 서부에 침공해 왔으나, 탁발울률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워 이를 크게 격파했다.[1] 321년, 동진의 원제가 대국에 사자를 보내 작위를 수여했지만, 탁발울률은 이를 거절했다.[1]

탁발율률 사후, 유씨(惟氏)의 아들 탁발하눅(拓跋賀傉)이 즉위했다. 탁발하눅은 어려서 유씨가 섭정했다. 유씨는 후조(後趙)와 친선을 다졌다.[1] 325년, 탁발하눅이 사망하고, 동생 탁발흘나(拓跋紇那)가 즉위했다.[1]

329년, 위기를 느낀 탁발흘나는 우문부로 망명했다. 하란부 및 여러 부족 대신들은 탁발예괴를 옹립하여 대왕(代王)으로 세웠다. 석륵은 화친 사절을 보냈고, 탁발예괴는 동생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을 양국(襄國)으로 보냈다.[1]

337년, 후조 석호는 장군 이목(李穆)에게 5천 기병을 주어 대녕을 공격하게 하고, 탁발예괴를 이주시켰다. 그러자 6천여 명의 부족 백성이 탁발흘나를 떠나 탁발예괴에게 합류했다. 탁발흘나는 전연(前燕)으로 도망쳤고, 국인들은 다시 탁발예괴를 옹립하여, 성락성(盛樂城)의 동남쪽 10리에 새로운 성락성을 쌓고 천도했다. 이후 탁발흘나의 소식은 불분명하다.[1]

탁발십익건의 치세 동안, 대나라는 번영을 누리며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탁발십익건은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한 관청을 설치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영토는 동쪽으로 예맥, 서쪽으로 페르가나, 남쪽으로 음산 산맥, 북쪽으로 사막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다. 10만 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으며, 340년에는 수도를 샬락(Shengle)으로 옮겼다. 탁발십익건은 전연과 우호 관계를 맺고 혼인 동맹을 맺었다. 모용황은 여동생을 시집보냈고, 탁발십익건은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1]

대국과 주변국


376년, 유위진의 요청으로 전진부견은 부락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대나라를 침공하게 했다. 탁발십익건은 음산 북쪽으로 도망쳤으나, 각 부족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켜 통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탁발십익건은 탁발근에게 사주받은 서장자 탁발실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나라는 전진의 지배하에 들어가 동서로 분할되었다.[1]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급격히 쇠퇴하자,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대나라를 재건하고 국호를 위(魏)로 바꾸면서 북위를 건국했다.

2. 1. 건국 이전

258년, 선비족의 추장 탁발력미는 백성을 이끌고 버려진 한나라운중군 성락을 점령했다. 그는 조위와 그 후계 국가인 서진의 봉신이 되었고, 인접 부족들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했다. 서진은 탁발씨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하여 부족 추장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여 그들을 약화시켰다. 294년 탁발록관이 추장이 된 후, 그는 탁발씨의 영토를 서부, 중부, 동부로 나누어 자신과 조카들에게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 분열은 10년 동안 지속되었고, 307년 서부 탁발씨의 추장 탁발일률이 다시 통일했다.

당시 서진은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1] 산시성흉노전조를 건국하여 중국 북부에 있는 서진을 위협했다.[1] 탁발씨가 이 분쟁에 처음 관여한 것은 304년으로, 중부와 서부 탁발씨가 한나라에 대항하는 서진에 지원군을 제공했다.[1] 탁발일률이 재통일한 후에야 그들은 서진을 지원하는 데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1] 310년, 탁발일률은 병주의 자사 유곤을 도와 철불-흉노의 추장 유호의 반란을 진압했다.[1]

단석괴의 통일 선비가 붕괴되고 다시 분열된 선비족에서 대두한 것이 탁발부(拓跋部)의 기원이다.[2] 258년, 대인(大人) 탁발력미는 성락(盛楽)(현재의 내몽골 자치구후허하오터 시후룬베이얼 시)으로 남하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2] 그는 주변 부족을 복속시키고 조위와 수교를 맺어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2] 그러나 그 확대를 두려워한 위관의 이간책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일으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 그 후 3대를 거쳐 294년에 탁발록관이 대인(大人)이 되었다.[2] 그는 부족을 3분할하여 자신은 동부를, 탁발의타에게 중부를, 탁발의로에게 서부를 각각 통치하게 했다.[2] 304년, 한(후의 전조)의 유연이 거병하자 사마등에 협력하여 유연을 토벌했다.[2] 307년, 탁발록관이 사망하자 뒤를 이은 탁발의로는 3분할된 탁발부를 다시 통일하고 스스로 대인(大人)이 되었다.[2]

2. 2. 탁발의로의 시대

310년, 탁발의로병주 자사 유곤과 협력하여 흉노족의 전조(한)와 맞서 싸웠다. 유곤의 추천으로 탁발의로는 대선우·대공(代公)에 봉해졌으나, 유주를 통치하던 왕준은 이를 거절했다. 탁발의로는 왕준의 공격을 격퇴했고, 유곤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유곤은 낙양 구원을 위해 탁발의로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탁발의로는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파견했다. 또한 탁발의로는 유곤에게 형북(陘北) 지역을 요구했고, 유곤은 이를 수용하여 누번·마읍·음관·번지·곽의 5개 현을 탁발의로에게 주었다. 이로써 탁발의로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311년, 유곤의 부하 형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탁발의로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하고 전조유총을 격퇴했다.

312년, 전조가 진양을 공격하자 탁발의로는 구원군을 파견하여 전조군을 물리쳤다. 탁발의로는 유찬 등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유곤에게 많은 물자를 양보했다.

313년, 탁발의로는 왕준의 요청으로 단질륙권 토벌에 나섰으나 패배했다. 이후 유곤과 함께 전조의 수도 평양 공격을 계획했으나, 전조군의 움직임에 퇴각했다. 같은 해 겨울, 탁발의로는 성락성을 북도로, 평성을 남도로 삼고, 장남 탁발육수에게 남부를 다스리게 했다.

314년, 석륵이 왕준을 제거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탁발의로에게 속한 여러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탁발의로는 이들을 진압했으나, 전조 공격 계획은 중단되었다.

315년, 서진의 민제는 탁발의로를 대왕(代王)으로 봉하고, 관직을 설치하고 형법을 제정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대국(代國)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탁발의로는 막내아들 탁발비연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장남 탁발육수의 반발을 샀다. 탁발의로는 탁발육수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 이후 탁발보근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국내는 혼란에 빠졌다.

2. 3. 혼란기

316년, 탁발의로가 장남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이어지면서 대는 혼란에 빠졌다. 탁발보근이 탁발육수를 죽이고 새로운 대왕(代王)을 칭했지만, 그는 위기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탁발보근과 그의 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족장들은 그의 사촌인 탁발울률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318년 6월, 철불부(鐵弗部)의 류호(劉虎)가 황하를 건너 다시 대국 서부에 침공해 왔다.[1] 7월, 탁발울률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워 이를 크게 격파했다.[1] 류호(劉虎)는 단기로 포위를 돌파하여 도주했다.[1] 류호(劉虎)의 종제인 류로고(劉路孤)는 부락을 이끌고 귀순해 왔으므로, 탁발울률은 딸을 주었다.[1]

그 후, 탁발울률은 서쪽으로 향하여 오손(烏孫)의 옛 땅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향하여 물길(勿吉) 서쪽의 지역을 병합했다.[1] 탁발부(拓跋部)의 병마는 강성했고, 기사(騎射)를 할 수 있는 장수는 백만에 달했다고 한다.[1] 다른 부족들을 압도하며, 대국은 북방에 패권을 떨쳤다.[1]

같은 해, 전조(前趙)의 유요(劉曜)가 진(晉)의 민제(愍帝)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1] 유요(劉曜)는 대국에 사자를 파견하여 화친을 꾀했지만, 탁발울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319년, 석륵(石勒)은 스스로 조(趙)(후조)왕을 칭하자, 대국과 화친을 꾀하며 형제가 될 것을 청했다.[1] 그러나 탁발울률은 사자를 참수하고 국교를 단절했다.[1]

유주자사(幽州刺史) 단필제의 병민은 기아로 흩어져 계(薊)를 지킬 힘을 잃고 상곡으로 이동하려 했다.[1] 탁발울률은 이를 공격하여 적군을 궤멸시켰다.[1] 단필제는 처자를 버리고 낙릉군으로 달아나 기주자사(冀州刺史) 소속에게 의지했다.[1]

320년, 량주자사(涼州刺史) 장무의 사자가 대국에 조공했다.[1]

321년, 동진의 원제가 대국에 사자를 보내 작위를 수여했지만, 탁발울률은 이를 거절했다.[1] 탁발울률에게는 남방을 평정하려는 뜻이 있었다.[1]

백모(伯母)인 유씨(惟氏)(탁발의타의 아내)는 탁발울률이 부족의 마음을 얻고, 그 세력이 강대해져 자신의 아들이 후계로 세워질 수 없음을 두려워했다.[1] 유씨는 탁발울률과 여러 대신들을 살해했고, 사망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1]

2. 4. 탁발울률의 시대

탁발율려는 철불(鐵弗) 흉노를 격파하고, 서쪽으로는 우순의 옛 영토를, 동쪽으로는 말갈의 서쪽 영토를 정복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321년, 기씨에게 암살당하면서 대(代)는 혼란에 빠졌다.

2. 5. 탁발흘나와 탁발예괴의 시대

탁발율률 사후, 유씨(惟氏)의 아들 탁발하눅(拓跋賀傉)이 즉위했다. 탁발하눅은 어려서 유씨가 섭정했다. 유씨는 후조(後趙)와 친선을 다졌고, 후조는 이들을 '여국(女国)의 사자'라고 불렀다.[1]

324년, 탁발하눅이 친정했으나, 여러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아 동목근산(東木根山)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1] 같은 해, 양주 자사 장무(張茂)가 죽고 형의 아들 장준(張駿)이 뒤를 잇자 대국(代国)에 조공 사절을 보냈다.[1]

325년, 탁발하눅이 사망하고, 동생 탁발흘나(拓跋紇那)가 즉위했다.[1]

327년, 후조 석륵(石勒)이 석호(石虎)에게 5천 기병을 주어 국경을 침공하게 했다. 탁발흘나는 구주(句注)·형북(陘北)에서 맞서 싸웠지만 불리해져 대녕(大寧)으로 옮겨갔다.[1]

당시 탁발율률의 장자 탁발예괴(拓跋翳槐)는 처가인 하란부(賀蘭部)에 있었다. 탁발흘나는 탁발예괴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하란애두(賀蘭藹頭)는 거부했다. 탁발흘나는 분노하여 우문부(宇文部)와 연합해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하란애두 등이 격퇴했다.[1]

329년, 위기를 느낀 탁발흘나는 우문부로 망명했다. 하란부 및 여러 부족 대신들은 탁발예괴를 옹립하여 대왕(代王)으로 세웠다. 석륵은 화친 사절을 보냈고, 탁발예괴는 동생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을 양국(襄國)으로 보냈다.[1]

335년, 하란애두가 태만하자 탁발예괴는 오만하다며 불러들여 살해했다. 이로 인해 여러 부족이 탁발예괴에게 실망하여 이반했다. 탁발흘나는 기회를 틈타 우문부에서 공격해 왔고, 여러 부족 대신들이 호응했다. 탁발예괴는 (鄴)으로 도망쳐 후조의 보호를 받았다. 석호는 저택·첩·하인·보물을 하사하며 후대했다. 이로써 탁발흘나는 다시 대왕 자리에 앉았다.[1]

337년, 후조 석호는 장군 이목(李穆)에게 5천 기병을 주어 대녕을 공격하게 하고, 탁발예괴를 이주시켰다. 그러자 6천여 명의 부족 백성이 탁발흘나를 떠나 탁발예괴에게 합류했다. 탁발흘나는 전연(前燕)으로 도망쳤고, 국인들은 다시 탁발예괴를 옹립하여, 성락성(盛樂城)의 동남쪽 10리에 새로운 성락성을 쌓고 천도했다. 이후 탁발흘나의 소식은 불분명하다.[1]

2. 6. 탁발십익건의 시대와 멸망

탁발십익건의 치세 동안, 대나라는 번영을 누리며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탁발십익건은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한 관청을 설치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영토는 동쪽으로 예맥, 서쪽으로 페르가나, 남쪽으로 음산 산맥, 북쪽으로 사막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다. 10만 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으며, 340년에는 수도를 샬락(Shengle)으로 옮겼다. 339년에는 백관을 설치하고, 반역, 살인, 강간, 절도 등의 법을 명문화하여 율령을 명확하게 했다. 그의 정치는 청렴하고 간결하다고 칭송받았으며, 연좌를 완화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1]

탁발십익건은 전연과 우호 관계를 맺고 혼인 동맹을 맺었다. 모용황은 여동생을 시집보냈고, 탁발십익건은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1] 그러나 343년, 탁발십익건이 전연에 다시 혼인을 요청하며 지참금으로 천 필의 말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1]

탁발십익건은 철불 부족과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철불 부족은 대나라에 대한 충성과 적대감을 번갈아 보였다. 341년, 흉노 철불부 유호가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격파했다. 유호가 죽고 아들 유무환이 귀순하자 딸을 시집보냈다.[1] 358년, 철불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자 유알두는 동쪽으로 도망쳤고, 남은 자들은 대부분 유실물기에게 귀순했다. 탁발십익건은 유실물기의 12형제를 모두 돌려보내 유알두와 서로 의심하게 하여 세력을 깎으려 했다.[1] 365년, 유위진이 배반하자 탁발십익건은 토벌에 나섰고, 유위진은 전진으로 망명했다.[1] 374년, 탁발십익건은 다시 유위진 정벌에 나섰고, 패배한 유위진은 남쪽으로 도주했다.[1]

376년, 유위진의 요청으로 전진부견은 부락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대나라를 침공하게 했다. 탁발십익건은 음산 북쪽으로 도망쳤으나, 각 부족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켜 통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탁발십익건은 탁발근에게 사주받은 서장자 탁발실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나라는 전진의 지배하에 들어가 동서로 분할되었다.[1]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급격히 쇠퇴하자,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대나라를 재건하고 국호를 위(魏)로 바꾸면서 북위를 건국했다.

3. 정치

탁발십익건은 즉위 후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백관을 설치하고 형법을 제정했다.[2] 설치된 관직으로는 좌우근시직(左右近侍職)과 내시령(内侍長) 등이 있었다. 좌우근시직은 정원 없이 근친자(가까운 친척) 중에서 선발되었고, 내시령은 정원이 4명으로 후의 시중·산기상시에 해당했다. 이러한 관직은 동진의 관제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2]

또한, 탁발십익건은 오환을 통치하기 위해 북부대인(北部大人)과 남부대인(南部大人)을 두었다. 처음에는 탁발고가 북부대인을, 탁발실군이 남부대인을 감독했으나, 후에는 유권, 유고인 등이 담당했다.[2]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 연좌제를 완화하기도 했다.

4. 군사

대(代)나라는 기마술에 능한 선비족의 특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탁발십익건의 치세 동안 대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10만 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고 한다. 탁발울률 시대에는 기사(騎射)를 할 수 있는 장수가 백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1]

대나라는 철불 흉노, 고차(高車) 등 주변 유목 민족들과 잦은 전쟁을 벌였다.[2] 탁발십익건은 철불 부족을 여러 차례 격파했지만, 376년 철불 부족의 추장인 유위진이 전진을 설득하여 대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탁발십익건과 그의 아들들이 암살되었고, 전진은 혼란을 틈타 운중을 점령하여 대나라를 멸망시켰다.

5. 외교

탁발력미는 조위와 그 후계 국가인 서진의 봉신이 되었고, 인접 부족들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했다.[1] 서진은 탁발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부족 추장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1]

탁발십익건 시기 대나라는 번영을 누리며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탁발십익건전연과 결혼 동맹을 맺었으나, 때때로 양국 관계가 긴장되어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6. 역대 군주

시호개인 이름재위 기간기타
신원(神元)선비 탁발리위219년 ~ 277년묘호: 시조(始祖)
장(章)탁발실록277년 ~ 286년
평(平)탁발초286년 ~ 293년
사(思)탁발부293년 ~ 294년
조(昭)탁발로관294년 ~ 307년
환(桓)탁발의타295년 ~ 305년
목(穆)탁발의로295년 ~ 316년
-탁발보근316년
-탁발316년
평문(平文)탁발율여316년 ~ 321년
회(惠)탁발합루321년 ~ 325년
양(陽)탁발혁나325년 ~ 329년, 335년 ~ 337년
열(烈)탁발의회329년 ~ 335년, 337년 ~ 338년
조성(昭成)탁발십이건338년 ~ 376년연호: 건국(建國)



대(代) 왕은 제6대 흘나(紇那)와 제7대 예괴(翳槐)가 각각 폐위된 후 복위했으므로, 8주(主)에 10대(代)를 헤아린다. 마지막 제8대 십익건(什翼犍)의 손자인 계(珪) 또한 전진이 약화되자 자립하여 대왕(代王)을 칭했지만, 이쪽은 통상 초대 위왕(魏王) (후의 북위 황제)으로 여기며, 역대 대왕에는 포함하지 않는다. 각 묘호시호는 모두 그 계(珪)가 북위 황제로서 즉위한 후에 선조에게 추시(追諡)한 것으로, "제(帝)"가 있어도 생존 중의 실제 칭호는 "왕(王)"이다.

성(姓)・휘(諱)묘호・시호재위속(続)
1탁발의로목제(穆帝)315년 ~ 316년탁발의이(拓跋猗㐌)의 동생
2탁발보근316년탁발의이(拓跋猗㐌)의 장남
3(불상)316년탁발보근의 아들, 요절
4탁발울률태조 평문제(太祖平文帝)317년 ~ 321년탁발의로의 동생 탁발불의 아들
유씨(惟氏)321년 ~ 324년 (태후 감국)탁발의이(拓跋猗㐌)의 아내
5탁발하육(拓跋賀傉)혜제(恵帝)321년 ~ 325년탁발의이(拓跋猗㐌)의 차남
6탁발흘나양제(煬帝)325년 ~ 329년 (폐위), 335년 ~ 337년탁발의이(拓跋猗㐌)의 삼남
7탁발예괴열제(烈帝)329년 ~ 335년 (폐위), 337년 ~ 338년탁발울률의 장남
8탁발십익건고조 소성제(高祖昭成帝)338년 ~ 376년 (전진에 멸망)탁발울률의 차남
탁발규태조 도무제(太祖道武帝)386년 (대왕을 칭하며 자립, 같은 해 위왕을 칭함)탁발십익건의 아들 탁발식의 아들


7. 계보

1세2세3세4세5세6세7세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초탁발부탁발예괴탁발식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초탁발부탁발십익건탁발규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타탁발보근아들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로탁발율여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로탁발하노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로탁발흘나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로탁발육수
탁발력미탁발사막한탁발실록탁발록관탁발의로탁발비연


8. 연호

건국 (338년 ~ 376년)

참조

[1]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2] 서적 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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